글은 여기에

참 바쁜 주말이었다

프리온라인 2009. 4. 21. 03:16

오늘은 일요일같은 월요일이었다. 모처럼 휴가를 냈기 때문.

원 없이 늘어지게 늦잠도 자고 내 세상이었다. 다만 핸드폰이 울리거나 문자가 날아오면 움찔움찔 놀라곤 했다. 휴가를 낸 게 죄는 아닌데,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벨 소리는 사람을 정말 놀라게 한다. 많은 전화통화 중에서 홍 선생 전화 딱 한 통만 받았다. (다른 분들께는 미안~)

 

지난 주말은 꽤나 다이내믹했다. 그 이야기를 쓰려고 자기 전에 블로그를 켰다.

 

먼저 금요일.

휴가원 결재를 받으니 그렇게 신이 날 수 없었다. 기분 탓인가. 홍 선생이 조르던 영화 <노잉(Knowing)>을 보기로 하고 일찌감치 퇴근을 했다. 재난영화이기도 하고 조금은 범우주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들었지만, 공포스럽고 기독교적인 영화인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홍 선생은 영화 관람 도중 우리를 두고 영화관을 나가버리는 짓을 또 저질렀다. 그야말로 '황매너'.  같이 온 홍 선생 친구 혜란 씨의 선동이라는데... 하여간 둘이 똑~같다 똑같아. 그렇게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남은 셋(지은, 혜진, 나)은 배도 채울 겸, 명동성당 근처의 호프집에서 장사가 끝날 때까지 웃고 떠들고 놀았다. 이놈의 수다본능이란~ ㅎㅎ

 

토요일.

원래 계획은 이렇다. 휴가낸 기념으로 학교에서 일 좀 하다가 약속장소로 이동. 사실은 오후에 강남에서 소개팅 계획이 잡혀 있었다. 진짜 모처럼 잡힌 소개팅. 나이 서른하나를 넘기는 순간부터 소개팅이 뚝 끊겨서 조마조마하고 있던 상황에 아는 과장님 한 분이 소개팅을 주선해 주셨다. 나에게 알려준 그녀의 신상은 "여자, 키는 168cm, 직장은 요 근처, 나이는 29 또는 30. 그리고 이름 석 자"가 전부였다. (이 정도면 충분한 건가?) 참 그리고 전화번호도 알려주셨지. 요즘은 주선자 없이 당사자들끼리 약속 정해서 둘이 그냥 만나는 거라 과장님께 말씀드렸다. 그녀의 신상 중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건 아무래도 키였다. 과장님께도 내 키가 작다는 걸 미리 말씀드리라고 당부를 했다. 난 키에 대한 콤플렉스는 고등학생 때 이후로 이미 안드로메다에까지 날려버렸지만, 여자 쪽에서는 분명 남자의 키에 대한 고민이 있으리라. 아무튼 전화번호를 받았던 그 다음 날 점심 때(당일날 저녁에는 회식이 있어서 깜박했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걸어 그녀가 잠실에 산다는 걸 확인한 다음, 약속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토요일 강남 5시.

 

형과 내가 동시에 차를 써야 하는 터라, 누나가 조카 둘을 데리고 원정을 왔다. 소개팅에는 늘 옷이 신경 쓰인다. 패션 감각 제로에 도전하는 나에게 소개팅 의상을 계절별로 몇 벌 맞춰놔야 하겠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캐주얼로 나가기로 했다. 대중교통 이용하라는 반대파를 무릅쓰고 차를 끌고 갔다. 날이 매우매우 맑았고 교통체증 없이 약속시간 10분 전에 강남역에 도착했다.

 

오! 뉴욕제과 앞에 먼저 나와 있던 그녀를 2초 이상 쳐다볼 수 없었다. 3초 이상 바라보면 그대로 사랑에 빠질 듯 했다. 그녀가 차를 탈 때, 일단은 차에서 내렸다. 내가 일부러라도 차를 끌고 온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키 때문이었다. 그래도 일단 내렸다. 그녀의 큰 키에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키 큰 여자에게 퇴짜 맞아 본 남자들은 다 그럴 거다. "좀 넓게 앉으세요." 큰 키가 불편할까봐 조수석 의자를 뒤로 밀어 넓게 앉으라 권했다.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의 나이부터 확인한 뒤,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이 어린 80년생. 주선자 이야기부터 직장, 가족, 취미생활 등등. 차는 강남역을 빠져나와 올림픽대로를 향해 달렸다. 하필 매형 네비게이션도 고장나서 차 안은 우리 둘의 목소리뿐이었다. 어쩌면 더 잘 됐다고 생각했다. 시끄러운 식당에 들어가서 둘이 마주보고 앉아 멀뚱하게 쳐다보는 것보다, 서로 같은 방향을 보며 둘만의 장소에서 조용히 이야기 나누는 게 더 나았다. 앗. 그녀의 정면에는 노란색 불법주차 딱지가 붙어 있었다. 민망하게.

 

좀처럼 누구한테 대놓고 예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나는 그날 몇 번이나 예쁘다는 말을 한 것 같다. 그녀가 민망해 할까봐 예쁘다는 말은 접었으니까. "저요... 지금. 아나운서 대리운전 하는 것 같아요." 진짜 그랬다. 그녀의 말투는 유치원 선생님같기도 했고, 아나운서 같기도 했다. 나는 자연스레 의심이 들었다. 도대체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쁜 이 참한 처자는 도대체 이 나이가 되도록 왜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 무슨 사연이 있는 사람일까... 강남역에서 내가 알려준 내 차 번호를 보고, 손을 들어 자신임을 확인시켜 주던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에고, 오늘 또 차이게 생겼네.'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었다. 그래도 일단 오늘 하루는 즐겁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내 마음에 더 들었다. 그리고 내 재치없는 농담에도 잘 웃어주는 그녀가 고마웠고, 밥 먹을 곳도 미리 정해두지 않고 목적지 없이 올림픽대로를 계속 달리고 있는 내가 참 답답~했다. "지금 어디로 가는지 모르시죠? ... ㅋㅋ 저도 몰라요." 이렇게 바보같은 소리만 하고 있다. 파란 하늘이 너무 좋았고, 누군가를 태우고 함께 드라이브를 가는 것이 그냥 좋았을 뿐이었다.

 

우리는 하남시청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참 난감하기도 하지. 소개팅 장소이기에는 좀 어색한 장소이긴 했다. 그래 랍스타를 먹자. 그러나 그녀는 랍스타는 너무 비싸다고 알아서 회를 시켰다. 그게 광어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회를 한 접시 시키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제 우리는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에는 학창시절 이야기. 고등학생 때까지는 "명랑발랄"하던 그녀가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생각이 깊어진다. 이 대목에서 그녀는 '98학번'인 것이 드러났다. 결국 빠른 80년생이라는 것. 풉. 나랑 동갑인 셈이다. 동갑이면 양띠. 우리 엄마는 좋아하시겠군. ㅋ

 

날은 벌써 어두워졌다. 이야기는 길게 했으니 후식을 또 먹으러 갈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아쉽지만 이제 헤어질 시간. 그녀의 집에 다 와 가며, 목구멍까지 차 오른 말이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바로 노골적인 애프터 신청이었다. 그런데 차마 그 말은 안 나오더라. 석촌동 집 앞에까지 데려다 줄 때도 나는 차에서 내리는 성의를 보여줬다. 어쩌면 그녀는 다시는 내 전화를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소개팅을 주선해 주신 모 과장님과 오늘 유난히 이야기 소재로 많이 등장한 우리 홍 선생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나는 석촌동을 떠나면서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오늘 즐거웠다. 답장이 바로 도착했는데, 답장도 무미건조하기는 마찬가지. 이러다 결국 날이 지나면 연락이 불통될 것이다.

 

 

일요일.

오늘은 "63시티, 63계단오르기대회" 날이다. 작년부터 시작된 재찬이의 조르기에 올해는 마음을 굳혀 참가신청을 했고, 오늘이 바로 대회날이다. 여의도로 출발. 재찬이도 어제 우리집에서 자고 함께 출발했다. 참 오랜만에 가보는 63빌딩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언제 갔는지도 기억나지 않을만큼 오래전 일이다. 대회장은 생각보다 썰렁했다. 재찬이 말로는 홍보가 많이 되지 않은 것 같단다. 우리는 배번(등에 붙이는 번호)을 받고 옷을 편하게 갈아입고 준비를 했다. 옆에서 울룰불룩 근육을 자랑하는 남자애들이 기를 죽였고, 싱싱한 남녀 커플이 또 기를 죽였다. 우리는 63시티에서 인정한 "김재찬, 최우석 커플"이었다. 단체참가자는 무조건 "커플"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게 행사진행 관계자의 설명. 젠장, 어차피 영어 쓸 거면 '팀'으로 하지.

 

1층 로비에서 간단한 준비운동을 하고, 모두 출발선에 정렬했다. 63빌딩의 층계가 좁은 관계로 약 3~5분 간격으로 한 팀씩 출발을 했다. 각자의 몸에 칩을 달았으므로 기록은 개별 집계된다. 우리는 한 여섯 번째로 출발하는 팀이 되었다. 아마도 63시티에서는 신청자의 이름을 가나다 순으로 해서 순번을 정한 모양이다. 덕분에 우리는 막판에 신청하고도 일찍 출발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런데 뭥미? 사회자가 한 팀씩 계속 인터뷰를 하는 게 아닌가. 아이고야. 장동건보다 잘생겼다는 둥, 목소리가 어떻다는 둥... 사람들의 호응이 전혀 없는 민망한 인터뷰를 마치고 '파이팅'을 외치고 출발했다. 과연 몇 층이나 제정신에 오를 수 있을까... 38번째 층에서 자기 생각해 달라고 홍 선생이 그랬는데.

 

각 8층마다 사진이 붙어있었다. 다 '63빌딩'과 관련 있는 사진이었는데, 우리는 상품을 타기 위해 그 그림을 외워야 했고, 숨이 헉헉 차오르는 와중에도 8층마다 나타나는 그림을 외워가며 쉴새 없이 발을 내딛었다. 자신감에 차 있던 재찬이는 앞서 가더니 뒤로 쳐지기 시작했다. 참가신청 할 때만 해도 '가능할까?' 생각했는데, 실제로 뛰어보니 가능하겠더라. 어느새 30층을 훌쩍 넘었고, 고지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12층마다는 물을 나눠주고 있었고, 중간중간에 비디오카메라로 1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뛰어오르는 참가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사진을 찍는 사람도 어느 한 층에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앞 세 팀을 제치고 올라갔고, 12분 42초 40으로 60층에 도착했다. 헉헉헉... 정말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기를 소진했다. 전망대를 구경하는 건 생각도 못했고, 그냥 기념 사진이랍시고 희뿌연 남산을 등지고 기념촬영을 했다. 60층에서는 이온음료를 나눠줘서 그걸 마시며 숨을 가라앉혔다. 전망대에 올라온 일반 관광객은 헐떡거리는 우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지나갔다. 황당하기도 하겠지. 분명 가슴에는 '63계단오르기대회'라는 글자가 인쇄된 배번이 있었으니 내용은 감잡았겠지만, 무모한 도전이라 생각했을 거다. 와~ 아무튼 신나더라. 우리는 숨을 고르고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내려가는 방법은 전망 엘리베이터. 1분도 안 되어 순식간에 지하1층까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자니 참 허망했다.

 

대회장에 다시 올라가니 아직도 출발 대기 중인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설문지 작성하고 초코바 얻어먹고, 아까 8층마다 있던 7개의 그림을 보고 그 순서를 맞춰 경품을 하나씩 받았다. 사실 7개 그림 중에서 스태프가 하나를 짚으면 우리가 맞히는 건데, 우리는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고,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하면서 전체 그림의 순서를 다 댔다. 당황하던 스태프가 그림 하나를 들춰보더니 - 그림의 뒷면에는 몇 번째 그림이었는지 써 있나보다 - 그 중 하나가 틀렸다기에 정정해서 다 맞혀 버렸다. 신기한 놈들. ㅋ

 

물품보관소로 와서 옷을 갈아입는데, 청바지 입다가 다리에 쥐가 났다. 어이없다. 혹시 내년에 이 대회에 참가를 고민하시는 분들은 다 뛰고 와서 바지 입다가 다리에 쥐 안 나게 조심하시라. 하하. 우린 다시 대회장으로 가서 요즘 KBS <개그콘서트>에서 '나쁜남자'로 주목 받는 개그맨 이승윤과 사진을 찍는 행운을 얻었다. '나쁜남자야~' 할 때 그 포즈도 같이 할 걸, 아쉽다.

 

우리는 집으로 오다가 신도림역 헌혈의 집에 들러 헌혈을 하고 집에 왔다. 최근에 바쁘다는 핑계로 둘 다 헌혈을 꽤나 오랫동안 못 했는데, 오늘 날 잡았지 뭐. 재찬이와 함께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와 보니, 내 방은 봄맞이 대공사 중이었다. 혼자 일하고 계신 아버지 도와가며 일 좀 하고 청소 좀 하고났더니 몸이 많이 피곤했나보다. 저녁 먹고 재찬이를 시흥사거리 데려다 주고 개콘 좀 보고나서 그냥 곯아떨어졌다.

 

이 정도면 주말 정말 바쁘게 잘 보냈지. 기쁘다.

근데 내일이면 출근이다. 무섭다. ㅠㅠ

 

참, 소개팅 그녀가 일요일에 이어 오늘도 답문을 바로바로 보내줬고, 오늘 아침에는 먼저 문자를 한 통 보내줬다. 퇴근할 때쯤 전화 한 통 해야지 하다가 또 잠들어서 때를 놓쳤다. 어쨌든 문자를 씹어먹지 않고 하루이틀 잘 지나가고 있으니, 어쩌면 내게도 조금의 희망이 있을지 모르겠다. 금주 내로 애프터 신청해야지. 그리고 방금 전에 몰~래 그녀의 미니홈피를 들어가 봤다. 자세히는 안 보고 메인 화면이랑 방명록 몇 개만 봤는데, 어제도 남긴 방명록 답글이 있는 걸 보면, 죽은 홈페이지는 아닌 듯. 근데, 메인 화면의 사진만 봐도 으미 좋은 거, 나 어쩌면 좋지? ㅎㅎㅎ 미쳤나봐.

 

아. 글 쓰다보니 벌써 새벽 3시 반이다. 이 글 쓰다가 도중에 아파트 전체가 정전 되어서 순간 소름 쫙- 돋았었는데. Daum에는 자동글저장 기능이 있어서 정전 사태에도 블로그 쓰던 글 한 글자도 안 날아가고 다 살려냈다.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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